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이클 잭슨/경력 (문단 편집) == 1995년~2000년: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HIStory]]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damienshields.com/MJ-HIStory-e1424144802835.jpg|width=100%]]}}} || 1980년대 후반부터 잭슨과 [[타블로이드]] 언론은 심각하게 부정적이고 어려운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는 결국 거짓으로 밝혀졌으나 전 세계적인 파장을 몰고 온 1차 아동 성추행 혐의로 그 관계가 완전히 부정적 기류를 타게 된다. 이 사건 이전에는 타블로이드를 제외한 일부 주요 언론은 무분별하게 루머를 생산하여 잭슨을 공격하는 행위를 보이지 않았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그 선은 없어진다. '''주요 언론과 [[타블로이드]]의 경계가 무너진 것이다.''' 이 앨범의 수록곡 중 일부는 타블로이드와 관련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새 앨범 작업은 1994년 1월 중순부터 시작되었으며, 대부분 그가 혼자 작곡하거나 공동 작곡했다. [[컨템퍼러리 R&B|R&B]], 팝, [[록 음악]], [[힙합 음악|힙합]], 일부 [[클래식(음악)|클래식]] 등이 앨범의 주요 장르이고 외로움, 탐욕, 환경문제, 인권문제, 불의에 대한 가사를 직접적이고 강력하게 표현한다. [[소니]] 뮤직은 앨범 홍보에 3,000만 달러를 투자했으며 언론의 큰 기대를 모았다. 타블로이드는 전과 마찬가지로 잭슨에 대한 근거없는 부정적 보도를 내보냈으나 대중들은 그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수많은 [[루머]]는 그의 명성을 깎아내렸지만 마이클 잭슨의 인기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마이클의 팀원들이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시작하고 그는 3월에 합류했다. 그는 [[Dangerous]] 앨범 제작 도중 만든 "They Don't Care About Us"를 완성하기를 원했으며 "Stranger in Moscow"의 작업을 시작했다. 늦은 봄 그리고 여름 동안 마이클은 더 많은 곡을 작업했다. "Money",‘1993년 10월 데뷔 힙합 앨범을 발표한 [[샤킬 오닐]]의 랩이 삽입된 "2 Bad", "D.S" 그리고 "Morphine" 모르핀은 제목과 달리 약물이 아니라 폭력과 고통에 대한 것이며 록 밴드 Nine Inch Nails의 앨범 Downward Spiral에서 영향을 받은 곡이라고 한다. 또한 10년 전 작업한 살해 사건 기사를 보고 마이클이 작곡한 사회 고발적인 곡 "Little Susie"를 꺼내기로 결정한다. 잭슨과 포스터의 대화 중에서 잭슨은 좋아하는 곡으로 [[찰리 채플린]]의 "Smile"을 언급했고 [[제임스 브라운]],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재키 윌슨]]처럼 채플린은 마이클에게 항상 영향을 끼쳤다. 영화 [[모던 타임즈|Modern Times]]에서 나온 채플린이 만든 Smile은 이때만 해도 기악곡이었고 18년후 존 터너와 제프레이 퍼슨스가 가사와 제목을 추가하여 익히 알려진 곡이 되었다. 마이클은 포스터와 오케스트라 트랙인 "Childhood"를 작업하기를 바랐고 이것은 5살 때부터 사생활 없이 무대에서 돈을 벌고 연예계 활동을 하며 유년기를 잃었던 자신의 경험을 반영한 것으로 [[네버랜드 랜치|네버랜드]]의 Giving Tree에서 작곡했다고 한다. 마이클은 이 노래의 가치가 중요하다며 "당신이 정말로 나에 대해 알고 싶다면 내가 쓴 노래 중 가장 정직한 "Childhood"가 있다며, 사람들은 그것을 경청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Smile과 Childhood 는 모두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했다. "Earth Song"은 1988년 6월 [[빈(오스트리아)|빈]]에서의 [[Bad]] 월드 투어 중 호텔 방에서 갑작스레 떠오른 아이디어로 1990년 8월 빌 보트렐과 작업을 완료했지만 마이클은 만족하지 못했고 2번째 파트에 기타 리프를 넣는 등 다시 작업했다. 마이클은 "나는 지구상의 많은 고통을 느끼고 있다며 이 노래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지구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다."라며 창작 동기를 설명했다. 앨범의 원래 출시 목표일은 1994년 6월이었으나 앨범의 완성도를 보완하면서 늦춰졌다. 마이클이 같이 일하기를 바랐던 프로듀서 [[지미 잼 & 테리 루이스]][* 당시 댄스여가수로는 마돈나와 함께 최고 주가를 달리던 여동생 [[자넷 잭슨]]의 프로듀서이다. 1986년부터 2006년까지 자넷 앨범 프로듀싱을 하며 이른바 자넷의 시대를 여는데 크게 이바지했다.]는 이번에는 자넷에게 동의를 받고 마이클과 같이 작업하며 약 5개의 곡을 만들었는 데 트랙이 자넷 바이브를 가져야 한다고 느꼈다. 그중 한곡은 자넷의 마음에 쏙 들었는데 마이클은 그 트랙이 아닌 강렬하고 하드한 다른 트랙을 선택했다. 참고로 자넷이 원했던 트랙은 1년후 녹음됐고 베스트 앨범인《Design of a Decade 1986-1996》에 수록된 "[[Runaway(자넷 잭슨)|Runaway]]"[* 여담으로 빌보드 싱글차트 3위를 기록하며 성공을 거두었다.]이다. "Tabloid Junkie"는 잼과 루이스가 가져온 트랙 중 하나의 개념에서 따온 것으로 마이클이 좋아하는 자넷 잭슨의 The Knowledge’에서 강한 영향을 받은 곡이다. 마이클은 잼에게 "HIStory"라는 제목의 곡을 써야 한다며 anthemic song을 원한다고 했다. 노래는 거대한 프로덕션이 됐다. [[Boyz II Men]]이 백킹 보컬로 오케스트라, 합창단이 동원됐고 역사적인 뉴스 사건과 연설을 녹음한 수많은 테이프도 사용했는데 160개의 트랙이 하나의 레코드로 믹싱되어 한 것이다. 그리고 마이클은 정말로 앨범 제작에 드는 시간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완벽주의자였고 잼은 마이클이 빠르고 정확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주변의 제작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이클은 [[Bad]] 때부터 그 누구도 듣지 못한 사운드를 원했으며 그것을 만들기 위해 부르스 스웨디언에게 오리지날 [[신디사이저]] 사운드를 만들 수있는 사람을 물었고 척 와일드를 제안했다. 마이클은 척에게 인간의 귀가 들어 본 적이없는 소리를 만들고 싶다며 격렬하고 독특하기를 바란다고 요청했고 제작한 것을 팀 멤버에게 배포하여 일부 트랙에 사용했다고 한다. 이후 [[R. 켈리]]도 합류했다. 마이클 팀은 "Life"와 "[[You Are Not Alone]]"의 데모 테이프를 받았는데 "Life"는 마이클이 마음에 들어했지만 최종적으로 선택된 것은 "You Are Not Alone"으로 "Life"는 R&B 밴드 K-Ci & Jojo가 녹음했다. "You Are Not Alone"은 좋았지만 더 많은 작업이 필요했고 마이클은 트랙을 다시 제작, 마지막 부분에 합창단을 추가, 마이클은 이것을 통해 '클라이막스와 구조적 감각'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 앨범에 마지막으로 들어간 곡은 [[비틀즈]]의 히트곡 "[[Come Together]]"였다. 마이클 잭슨이 가장 좋아하는 비틀즈의 노래 중 하나로 1986년 [[Bad]] 앨범 제작 때 빌 보트렐과 대략적으로 완성한 것으로 9년 후 새 앨범에 수록하기로 결정했다. 언론은 '''HIStory의 발매 소식'''이 들리자마자 여러 방향으로 '''엄청난 기삿거리'''를 쏟아냈는데, 1993년 발생한 1차 아동 성추행 혐의와 그의 전작들이 모두 국제적인 성공을 거둔 것을 언급하며 "과연 이번 앨범은 전작들과 비교하여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라는 호기심을 내비쳤다. [[HIStory]]는 [[빌보드 200]]에서 1위를 기록했고, '''발매 직후 19개 국가의 앨범차트에서 1위로 데뷔'''했다. 총 6개의 싱글이 발매되었으며, 여동생 [[자넷 잭슨]]과 듀엣을 진행한 "Scream"이 빌보드 싱글차트에서 5위로 데뷔했다. 이는 '''[[빌보드 핫 100]] 37년 역사상 최초의 핫샷 5위''' 기록이다. 또한 '''뮤직 비디오는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이 투자된 뮤직 비디오로 [[기네스 북]]에 등재'''되었다. 두 번째 싱글 "[[You Are Not Alone]]"은 9월 2일 1위를 기록했고, 이는 '''최초의 핫샷 1위''' 기록이다. 이 노래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정상을 차지했으며 예술적, 상업적 측면에서 찬사를 받았다. 이후 "Earth Song"은 미국에서 싱글로 발매되지 않았고, 6주간 영국차트에서 1위를 유지했다. 이는 1995년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여러 유럽차트를 강타했으며 특히 [[영국]]의 경우, 싱글만 100만 장 이상이 팔리며 영국에서 [[Billie Jean]]의 성공을 능가하는 잭슨의 대표 싱글로 자리 잡았다. "This Time Around"는 네 번째 싱글이자 앨범의 첫 번째 프로모션 싱글이었다. "They Don't Care About Us"는 빌보드 싱글차트 30위를 기록했고 총 14개국에서 top 10을 기록했다. "Stranger in Moscow"는 여섯 번째 싱글이자 앨범의 마지막 싱글이었다. 빌보드에서 91위를 기록했고, 미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차트의 최상위권에 머물렀다. 평론가들에게 엄청난 찬사를 받았는데, 최고의 재료로 만들어진 완벽한 팝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미묘하고 감동적인 묘사 또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앨범은 현재까지 2,200만 장 이상이 팔리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이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더블 앨범]]이다.''' [[HIStory]]는 일반적으로 평론가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일부 평론가들은 새로운 스튜디오 앨범의 특이한 형식에 대해 '''최고의 히트곡 컬렉션이 수반'''된다고 평했고, [[롤링 스톤]]의 제임스 헌터는 지난해에 잭슨이 경험한 사건에 대한 분노가 느껴진다고 표현했다. Earth Song을 실험적인 음악으로 묘사했으며 All Music의 스티븐 토마스는 '''[[마이클 잭슨]]의 자아에 대한 기념비적인 업적'''이라며 호평했다. 에를와인은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이 포함'''되어 있다는 찬사를 내놓았다. 다만 지금까지 마이클 잭슨이 녹음한 "가장 개인적인 앨범"에 대해 과거의 문제를 계속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일부 부정적 평가를 받았는데, 이는 잭슨의 성인 이후 '''앨범의 어느 한 부분이 전면적으로 부정적 평가를 받은 첫 번째 작품'''이다. 일부 논란이 있었지만 음악적,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며 [[HIStory]]는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 [[You Are Not Alone]]은 올해의 노래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에는 실패했다. 잭슨은 앨범 제작 과정에 적극적으로 대다수에 참여했으며 앨범의 주제는 그의 인생에 대한 것으로 최근 사건에 대한 자신의 심리를 투영하고 있다. 잼은 예술가의 개인적 감정이 음악에 반영되면 다른 에너지를 제공한다고 말하며 그 앨범은 자신의 생각을 노래하는 매우 적극적이고 개인적인 그 부분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는 가장 훌륭한 잭슨의 앨범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앨범의 사회적인 비판 때문인지 [[미국]]에서는 혹평을 받았고 유럽에서는 차트에 여러 곡이 진입하는 등 확실히 미국보다 반응이 좋았으며 특히 [[동유럽]]에서는 해방자로 불릴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실제로 출시 전 앨범이 완성된 후 잭슨은 미국 내 음반사 임원 등을 초대했고 약 30명의 사람들 앞에서 앨범이 첫 공개됐으나 초대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또 수록곡 They Don't Care About Us의 가사 중 "Jew"라는 단어가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이라며 논란이 있었으나 마이클은 Jew라는 용어는 [[사회 운동|사회 문제를 고발하기 위해 선택한 용어]]이지 결코 인종차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며 해명했고 가사를 수정하여 재발매했다. 하지만 곡의 내용이 제도권의 탐욕과 권력을 비판하는 내용이라 모호하긴 하다. 실제로 미국 대기업 CEO의 60%가 유대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비평가들은 [[HIStory]] 앨범에 대해 적대적인 평을 냈으며 홍보를 위한 티저 동영상이 팝스타를 지나치게 우상화하는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HIStory]] 앨범의 전체적인 내용은 차별과 탐욕, 편견에 대한 비판이니 평론가들의 행보를 앨범 내용이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잭슨은 이에 대해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며 별 언급을 하지 않았다. 잭슨은 [[Dangerous]] 월드 투어 때부터 미국에서 공연하지 않았다. 이후 잭슨은 "[[HIStory]] World Tour"의 개막을 알린다. 이 투어는 1996년 5월 29일에 발표되었고 잭슨의 [[Dangerous]] 월드 투어 이후 진행된, '''마이클 잭슨의 마지막 월드 투어'''이다. 총 5개 대륙, 82번의 공연에서 '''45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첫 콘서트는 [[프라하]]의 레트나 파크에서 공연되었으며, 12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한 '''역사상 가장 규모있는 콘서트''' 중 하나였다. 1996년 10월 7일, 그는 [[아랍]]에서 처음으로 공연을 했다. 그는 [[튀니지]]에서 90,000명의 팬들 앞에서 콘서트를 진행했으며 [[호주]] [[시드니]]에서 투어를 하는 동안 데비 로우와 비공개적으로 결혼했다. 1997년 1월 3일부터 4일까지, 잭슨은 [[하와이]] 호놀룰루의 알로하 경기장에서 35,000명의 관중을 동원하여 유일한 두 번의 미국 콘서트를 진행하였으며 경기장을 매진시킨 역사상 최초의 예술가가 되었다. 약 '''55,000명의 평균 관객을 동원'''하였으며 이는 '''역사상 네 번째로 많은 평균 관객을 동원한 투어'''이자 '''[[Dangerous]] 월드 투어에 이어 90년대 두 번째로 많은 평균 관객을 동원한 투어'''이다. [[립싱크]] 논란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90년대 후반, 마이클 잭슨의 목상태는 최악 중 최악이었다. 그러나 그 상태로 투어를 진행해야 했던 잭슨은 퍼포먼스의 비중을 과감히 늘리고 세트리스트의 거의 모든 곡들을 립싱크 처리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무리 퍼포먼스를 증가시킨다 하더라도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2차전은 1997년 5월 31일 [[독일]] [[브레멘]]의 베서스타디온에서 시작되었다. 세트 리스트 변경사항에는 Blood On The Dance Floor가 추가되었고, 이후 [[Off the Wall]] 메들리와 The Way You Make Me Feel의 제거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Blood On The Dance Floor는 1997년 8월 19일 [[오슬로]] 콘서트가 끝난 후 세트 리스트에서 제외되었다. 잭슨은 39번째 생일을 맞아 [[덴마크]] [[코펜하겐]]의 파켄 스타디움에서 60,000명의 팬들과 함께 공연을 했다. 그는 [[You Are Not Alone]] 공연 후 무대에서 깜짝 생일 케이크, 행진 밴드, 불꽃놀이를 선보였다. [[벨기에]] [[오스텐드]]의 히포드롬 웰링턴에서의 콘서트는 원래 1997년 8월 31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웨일스 공주의 죽음으로 인해 9월 3일로 연기되었다. 마이클은 1997년 8월 24일과 26일 [[핀란드]] [[헬싱키]]의 올림픽 경기장에서 공연을 했다. [[타블로이드]]와 일부 미디어에선 끊임없이 마이클을 비하하고 루머를 퍼트렸지만 대중들은 여전히 최고의 슈퍼스타의 공연에는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투어 도중 호주에서 잭슨이 진료받던 피부과의 간호사였던 "데비 로우"와 결혼을 하여 "프린스"와 "[[패리스 잭슨|패리스]]" 두 자녀[* [[마이클 잭슨]]의 자녀들이 전형적인 흑인의 피부가 아닌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친부 논란이 시작됐으나 잭슨은 혼혈로, 누나인 라토야 잭슨은 백인에 가까운 흰 피부이며 마이클의 친척들도 피부색이 다양하니 이 또한 교차검증 없는 전형적인 흥미 위주 루머인 것이다. 마이클은 2003년 마틴 바쉬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친부임을 밝혔다. 마이클 사후에 해명된 여러 루머들과 마찬가지로 친부 논란 또한 프린스에게서도 [[백반증]]이 나타난 것이 포착되고 패리스도 점차 머리와 피부색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가라앉기 시작했다. 사실 친부 논란을 제기하는 쪽 자체가 아무런 의학적 근거가 없는 것이며 흑인 혼혈과 백인 사이의 혼혈에선 백인과 가까운 외모의 자녀가 출생하는 것이 드문 일도 아니다. 당시의 이러한 지나친 사생활에 대한 타블로이드식 가십들은 사실 후반부로 갈수록 사회비판적인 내용의 음악 활동을 했던 마이클의 메시지에 대한 주목도를 떨어뜨리기 위한 당시 제도권의 반발이 들어간 미디어의 주동이 작용한 것이란 해석도 있다.]를 출산하게 된다. 이후 데비 로우와 이혼했지만 데비는 마이클의 여러 구설수에 대해 그를 지지하며 우정을 계속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HIStory World Tour의 전반기가 끝나고 [[Blood on the Dance Floor: HIStory in the Mix]]를 발매한 다음 후반기 투어를 시작했다. 이 앨범에서는 5개의 신곡과 [[HIStory]] 앨범의 수록곡을 리믹스한 8곡을 포함시켰다. 싱글로 발매된 곡은 "Blood on the dance floor", "Ghosts", "Is It scary"(잼과 루이스가 만든 곡으로 HIStory에 수록되지 않았다.)인데 Blood On The Dance Floor는 영국, 에스파냐, 뉴질랜드, 덴마크에서 1위를 했다. 이 시기에도 [[타블로이드]] 언론에서는 연일 마이클 잭슨의 사생활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허위보도와 [[루머]]들로 마이클의 유명세를 이용한 장사를 계속하고 있었고, 마이클은 이러한 [[황색언론]]들에 대한 스트레스로 당시 미디어를 거의 보지 않았으며 심한 불면증을 앓았다고 한다. [[Dangerous]] 월드 투어 때부터 격렬한 안무로 진통제를 투여했으나 이는 합법적인 처방이었고 실제로 마이클이 사망했을 때 마이클이 나이에 비해 심한 퇴행성 관절염을 앓았던 것이 부검결과 밝혀졌다. 마이클 사후에 한때 사망 원인을 약물중독으로 몰아가는 시각도 있었으나 이 또한 타블로이드가 주축이 된 미디어에서 만든 루머이며 부검 결과 치사량의 진정제를 투여당해 심장마비를 일으킨 [[살해]]인 것이 밝혀졌고 주치의의 [[과실치사]]에 대한 재판과정에서 마이클이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투여한 것 까지 밝혀져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는 4년형을 선고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